"프리다 칼로'OST' Frida Kahlo, 1907-1954, 멕시코 ◈SOS poisonous Music◈


FridaOST


"상처입은 사슴 1946"


"난 마지막 떠나는 날은 즐거웠으면 한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고 싶지 않다."


"떠 있는 침대Henry Ford Hospital,"

[미국에서 아기를 갖지만 몸이 망가진 프리다는 디에고가 다른 여자와 있는 사이에 피를 흘리고 쓰러져 있다.프리다는 내 아이를 보여달라고 소리 지른다]



"버스, 1929년"

1910년 이전의 멕시코는 비록 스페인 식민 지배자들은 떠났지만, 사회 체제와 경제 구조는 그대로인 상황이었다.

대다수 농민들은 여전히 대지주의 지배 아래 놓여 있었고, 대지주들은 사병으로 무장된 강제력을 가지고 있었다.

열 다섯명의 지주가 백만 헥타르에 이르는 토지를 지배했고, 광활한 개인 소유지를 오가기 위해서는 지주가 개인적으로 소유한 철도를

 이용해 할 정도였다.  그들은 마치 식민 지배자처럼 굴었고, 시몬 볼리바르 이래 계속된 상류층의 허례허식과 유럽에 대한 동경을 버리지

못했다.

이들은 영국에서 가정교사를 초빙했고, 파리로 빨랫감을 보냈으며 오스트리아산 철제금고를 들였다. '프리다 칼로' 가 '디에고 리베라'를

 최초로 만난 것은 1923년 디에고가 멕시코 시티 국립 예비학교에서 교육부가 주문한 프레스코 벽화 작업을 하고 있을 무렵의 일이었다.

디에고는 벌써 꽤 이름난 화가였고, 이미 복잡한 여자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 당시 그의 연인은 루프 마린이었는데 그녀는 디에고의주변여자

관계에 대해 매우 날카롭게 대응하고 있었다.

디에고가 벽화 작업을 하고 있는 동안 루프 마린은 그 주변에서 수를 놓고 있었는데, 그때 작업장이 주변이 소란스러워지면서 한 어린

소녀가 떠밀리다시피 해서 작업장 안으로 들어왔다. 이 날의 순간을 디에고는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그녀는 보기 드문 품위를 지녔고, 확신에 찬모습이었다. 눈에는 기묘한 불길이 타오르고, 가슴은 봉긋 솟아오르기 시작하여 마치 아이

같지 않은 매력을 갖추고 있었다."

'1925년 9월 17일' 오후. 타고 가던 버스가 전차와 부딪히는 사고는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지만 그 후유증은 평생을 두고 그녀의 삶을

짓이겨 놓았다.

가슴 속에 뜨거운 열기를 품었고, 놀라운 예술적 재능을 지닌 아리따운 소녀의 몸은 승객용 손잡이들이 달려 있던 쇠파이프에 몸 한복판을

 관통당했다.

 파이프는 옆가슴을 뚫고 들어와 골반을 통해 이어진 질을 뚫고 허벅지로 나왔고, 의사들은 세 군데의 요추 골절과 쇄골 골절, 제3,

제4 늑골 골절, 세 군데의 골반 골절,어깨뼈의 탈구, 그리고 오른쪽 다리의 열두 군데 골절과 비틀리고 짓이겨진 오른발을 발견했다.

그녀는 자신의 자화상을 그렸다. "나는 병이 난 것이 아니라 부서졌다. 그러나 그림을 그리는 동안만은 행복하다"라고...

디에고를 만난 프리다는 그에게 가장 빨리 다가갈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1925년의 고통스러운 사고를겪고 난 뒤에도 자신이

 선택한 사람의 인생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이 방법을 택했다.

그녀는 자신이 황홀하게 바라보았던 남자, 그의 부인이 되어 그의 아이들을 낳고 키우리라마음먹었던 남자와의 재회를 위해 서둘러 화가가

 되어야만했다. 프리다 칼로는 디에고 리베라에게 성큼성큼 걸어들어갔고, 디에고는 그녀에게 빨려 들어갔다.

1970년대 페미니즘이 기세를 떨치기 전까지 프리다 칼로의 이름은 없었다.

그녀는 단지 프리섹스주의자, 양성애자,스탈린주의자 그외 디에고 리베라의 세번째 부인 등등으로 불렸다.

그녀는 가끔씩 재발하는 상처와 싸웠고, 코르셋과 목발에 의지해 걸었지만 이제까지는 별로 관심없어 하던 세계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프리다 역시 신문과 잡지를 통해 멕시코의 현실과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뜨거운 혁명의 열기에 젖어들었다.

멕시코 혁명은 판초 비야와 에밀리아노 사파타의 암살과 함께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민중봉기를 이끈 이들에 대한 기억은 멕시코 민중들의 뇌리 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었고, 부자들이 지배하던 세상에 대해 저항했던

 혁명의 위풍당당함 역시 살아 있었다.

혁명가들이 세상을 뒤엎어 버리지는 못했지만 멕시코 민중들에게 돌아가는 혁명의 과실은 그 이전보단 확실히 풍성했다.

이제 교육은 더 이상 중산층만의 특권이 아니었고, 배고픔 못지 않게 교육의 갈증을 해소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민중들도 깨달았다.

디에고가 프리다와 결혼한지 두 달 즈음에... 그 가 혼신을 다해 지원했고 그 스스로가 만들다시피한 멕시코 공산당은 디에고를 멕시코

소시민 계급 출신의 어용화가라 칭하며, '디에고 리베라 동무'의 제명을 공식선언했다.

디에고는 환상에서 깨어났고, 그 곁을 프리다가 지켜 주었다.

프리다는 디에고를 비난하는 당과 친구들과의 관계를 모두 청산했다.

이 무렵 디에고는 매우 활발하게 활동했지만 프리다는 건강이 매우 좋은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작품을 그리지 못했다.

대신에 그녀는 늘 디에고와 함게 했다.

그녀는 디에고와 어디든 동행했고 그를 위해 식사를 준비했고, 그의 생활을 관리해주었고 그에게 영감을 주었으며 함게 상상의 세계를

만들어 나갔고, 그녀는 디에고를 위해 자신의 외모를 바꾸었다.

"일생 동안 나는 두 번의 심각한 사고를 당했습니다. 하나는 18살 때 나를 부스러뜨린 전차입니다.

부서진 척추는 20년 동안 움직일 수가 없었죠. 

두번째 사고는 바로 디에고와의 만남입니다." 라고 말하고 있듯이 디에고는 평생을 두고 프리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미국에서 돌아온 디에고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여전한 멕시코와 라틴 아메리카의 현실이었고, 유산으로 갈갈이 찢어진 몸으로 돌아온

프리다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어머니의 죽음이었다.

그리고 이즈음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일은 치매에 걸린 아버지의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일이었으며 어린 시절 서로에게 가장 애증의

 관계로 엮였던 동생 크리스티나가 자신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는 디에고와 매우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었다.

'1934년 여름', 동생 크리스티나의 고백을 통해 이 사실을 알게 된 프리다는 깊은 절망에 빠졌다.

크리스티나는 그녀에게 남은 거의 마지막 친구이자 동지였고 무엇보다 자신의 동생이었다.

설령 디에고가 세상 모든 여인과 정분이 난다고 할지라도 피했어야 할 여인이었다.

프리다는 단숨에 모든 걸 다 잃었다.. 프리다는 드디어 디에고의 곁을 떠나기로 결심했고, 실천에 옮겼다.

프리다는 세상을 떠나기 전날 밤 디에고에게 이제 17일 가량 남은 결혼 25주년 기념 반지를 미리 건넸다.

디에고가 왜 반지를 미리 주는가 묻자 '머지 않아 당신 곁을 떠날 것 같아서 그래요'라고 말했다.

그녀가 쓴 마지막 일기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다.

"이 외출이 행복하기를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기를."

프리다는 세상에 온지 정확히 47년 7일을 살고, 6월 13일 세상을 떠났다.

그녀가 죽은 다음날 폭우가 쏟아졌다.

디에고는 프리다가 죽은 뒤 일년이 채 못된 1955년 6월 29일 오랜 조력자 중 하나였던 엠마 우르타도와 조용한 결혼식을 치뤘다.

디에고 리베라의 누이었던 마리아 델 필라의 회고에 따르면 이들의 결혼은 죽기 직전의 프리다가 엠마에게 부탁한 일이었다고 한다.

그녀는 엠마에게 자신이 죽은 뒤, 디에고와 결혼하여 그를 보살펴달라고 부탁했다는 것이다.

엠마와 디에고의 결혼생활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프리다가 세상을 떠난 지 3년 4개월 뒤 디에고도 이승을 등졌기 때문이다. - SOS poisonous Music ->


멕시코와미국의전쟁앞에선자화상 (캔버스에유채)1932


부서진 기둥 1944



뿌리혹은거친땅1943(금속에유채)

2006-05-25 소더비 뉴욕 경매에서 중남미 예술작품 가운데 가장 높은 가격인 560만 달러에 낙찰됨,금속에 유화로 그려진 이 작품은 화산으로 뒤덮인 멕시코 대지를 배경으로 식물의 뿌리와 프리다 칼로의 핏줄이 얽혀있는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소더비의 남미 예술 책임자는 이 작품이 아기가 없는 프리다가 남편 디에고를 자연의 품 처럼 평생 아끼고 사랑하겠다는 의지를 그리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우주와 지구, 그리고 멕시코에서 나와 디에고,1949, 캔버스 유채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퍼시픽 증권사 벽화 - 디에고 리베라


불쌍한 조부모님, 부모님 그리고 나, 1936, 금속판에 유채


땅의 과일들, 1938, 캔버스에 유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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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영국 런던에서 열린 멕시코 여류화가 프리다 칼로의 전시회에서 한 큐레이터가 '2명의 프리다'란 제목의 그림을 감상하고 있다.

Posted by 천마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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