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여년이상을 통치하고있다는것은, 즉,독재정치를 하고있다는 것이기도하다..."

1959년 쿠바에 있서서 피텔 카스트로 와 체게바라 에 의하여 이데올로기적인 사상혁명 이후, 카스트로 1인 집권하에 40여년이 흐르는동안 쿠바의 대중문화예술은 수면밑으로 가라앉았다...

그런점에서도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Buena Vista Social Club)의 등장은 의미가깊다...

혁명이전 쿠바의 대중문화예술을 이끌어갔던 음악계의 거장들을 40여년이흐른 지금에서 세상밖으로 꺼냈으니 말이다...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Buena Vista Social Club)은 쿠바 아바나 동부에 있는 노인들 사교 클럽 이름.'환영받는 사교클럽’이란 뜻이다.

기타리스트이자 당대 최고의 월드 뮤직 프로듀서인 라이 쿠더는 1996년 쿠바 아바나로 들어가 30~50년대를 누볐던 노장들을'끌어모아'아바나에 있는 1950년대 스타일 스튜디오에서 단 6일만에 거의 모든 연주를 편집 없이 라이브로 녹음했다.

라이 쿠터가 쿠바에서 첫번째한일은 후안 데 마르코스 곤살레스를 찾는일이었다,

마침내 그는 다 해진 가방을 메고 나타나 비록 초라한 모습이었지만 그는 힘과 완숙함이 넘쳐나는 블루스 음악을 들려줬다.

라이 쿠더의 놀람은 계속됐다.

녹음실로 허름하게 생긴 노인이 찾아와 피아노를 쳐보게 해달라고 사정하자 쿠더가 마지못해 허락했다가 "내가 들어봤던 피아니스트 가운데 가장 위대한 연주인이다"라고 감탄하게 만든 루벤 곤살레스(81.피아노)도 비슷한 경우다.

냇 킹 콜, 에디트 피아프와 함께 공연한 적이 있는 오마라 포르투온도(70)는 우연히 스튜디오에 들렀다가 라이 쿠더의 제의로 즉석에서 녹음에 참여한 여성 가수다.

그런가 하면 드럼을 친 훌리앙 오비에도 산체스는 97년 녹음 당시 15세여서, 최고령과 최연소 멤버의 나이 차는 무려 75년이었다.

맘보, 볼레로, 단손 등 쿠바음악의 본류와 함께 아프로-쿠반 재즈와 라틴 재즈의 진수를 담은 이 앨범(Buena Vista Social Club)은 1997년첫 음반을 발매하자마자 클래식과 팝, 재즈계로부터 즉각적인 환호와 순식간에 세계적으로 200만장 넘게 팔렸고, 빌보드 차트를 강타하며,그해 그래미 어워즈를 움켜쥐었다.

1998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과 미국 뉴욕 카네기홀에서의 콘서트를 잇달아 성공시키며, 이브라임 페레르처럼 (부에나 비스타.)의 구성원들은 각자가 하나의 '전설'을 만들어 냈다. -

["어떤 '천사'가 나타나서는 '이리와, 함께 녹음하자'라고 말하더군. 처음에 난 원치 않았어, 이미 음악을 포기한 지 오래였거든. 하지만 지금은 내 생애 유일한 앨범을 갖게 됐고, 매우 행복해. 난 이제 더이상 구두를 닦지 않아도 돼." 10대 중반에 가수로 나서 50년대 전성기를 누렸던 이브라임 페레르(73)는 이렇게 구두닦이 생활을 마감했다."] -

쿠바 음악은 아프리카 리듬과 스페인 계통의 음악이 결합된 ‘아프로-큐반 ’이란 혼혈음악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변화와 생성을 거듭한 쿠바 음악 가운데 1930년대 이후 현대 쿠바 댄스음악 ‘손’(Son)은 미국과 아프리카에서 룸바와 맘보가 유행하는데 기초가 되었다.또 현재 국내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살사의 토대를 이뤘다. -

쿠바음악은 설탕.과일.담배에 이어 쿠바의 외화수입원 4위에 오를 정도로 커졌다.

부에나는 여기에 단단히 일조를 했다. 이것은 쿠바음악인들에게 대단히 큰 희망을 주기도한 반면 음악과 돈이 같이 갈 수 있다는 생각도 갖게 했다. -

부에나의 음악이 우수하지만 그것이 모든 쿠바음악을 대표한다고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맘보, 차차차, 룸바, 살사 등의 원조답게 쿠바음악역시 너무도 다양하다.

쿠바대중음악의 대표음악으로 부각된 부에나가 오히려 그 다양함을 차단할수 있을거란 생각이드는건, 괜한생각일까...!

Buena Vista Social Club orGuevara

게바라 [Guevara (de la Serna), Ernesto, 1928.6.14~1967.10]

'민중은 항상 새로운 이벤트에 스스로 중독되길 원한다'...

피델 카스트로 는 이러한 민중의심리를 잘파악하였고 수시로 새로운 이슈를 만들어 내어 마침내 민중의 관심과 마음을 차지하였다...

"1952년 바티스타의 쿠데타가 있은 지 수주일 후 한 청년 변호사가 독재자 바티스타가 쿠바 민법을 위반했다며, 아바나의 헌법 보장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이는 민중에게 자신의색깔을 분명히, 효과적으로 알리기위한 하나의 제스처였고 추후 혁명을 예고하는 서막이었다." -

시대가 영웅을 만들어내듯이 게바라역시 시대가 만들어낸 영움이다.

만성천식의 병약한소년이 그의지역 시대상황과 주변인물, 상황등이 절묘하게 일치함으로서 그는 혁명가로서의 발을딛게된다.. -

["게바라와 카스트로 일행이 쿠바상륙 이후 교전중에 다급하게 퇴각하면서 동료가 보급품을 버려두고 달아나자 게바라는 챙겨갈 것을 종용했다.동료는 지금은 그것을 따질때가 아니라면서 외면했다. 게바라는 고민한다. 다 들고 갈수는 없다.

"탄약상자와 의약품상자중 나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의약품이냐, 탄약이냐? 나는 누구인가? 의사인가, 혁명가인가? 나는 결국 탄약통을 짊어졌다."게바라의 일기는 이렇게 적고 있다..." ] -

그는 혁명이후 자본가로부터몰수한 자본을민중에게 돌려주고 자본가의착취를 막으면 민중의 생활이 당연히 좋아지리라는 지극히 혁명가적인 단순한 생각을 한다

그는 쿠바의 경제최고요직의 자리에 올라서면서 이를실천에 옮긴다.

또한,농민과함께 농사지으며 같이 먹고자고 할정도로 민중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아니, 지나칠정도로 광적으로 민중을 사랑했다고 표현하는게 맞겠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민중의생활은 오히려 이전보다 더욱나빠짐을알게됨으로서 스스로의 딜레마에 빠지고만다..

민중의 배고픔을 덜어줄수있는 최선의 방안은 자본가와 손잡는 길뿐이란걸 ...

자본가를 극도로 협오하는 그자신이 경제최고요직에 있는이상 그는 민중의 배고픔을 덜어줄수는 없다고 생각했을런지모른다..

어느날 눈을떠보니 자신이 민중앞에 커다란동상 이되었다는걸 깨달으며 그의신념은 끊어진 철로를 달리는 기차처럼 질주하고만다.

그는 카스트로와 비밀담화를 갖는다.. 그날이후 그는 사라졌다..

신문언론등에서는 납치 살해등등의 루머가 나오고,,, 얼마후 그는 볼리비아의 민중혁명에 등장하게되나 볼리비아민중의 저조한참여와 오히려 배반등의 상태에서 고난을격게된다.

그가추구한 혁명의근본적인 목표는 민중의,삶의질을높이는 것인데,자본시장이라는 이해와의 대립에서 그자신스스로 영원한 숙제를 남기며,결국은 1967년 10월 볼리비아에서 최후를 맞이한다

그의 일기중에 "무릅을 끓느니 서서죽는다" 라는말에서 그는이미 전부터 영원한혁명가로 남기위하여..투사로서의 죽엄을 선택했을런지도모른다.

그는 중남미의 자본가와 민중의 이해에관하여서만큼은 혁명가적인 투사로서의 영웅이지만, 정신적인 영웅으로 생각하기에는 격이안맞는다.

그는 정신적인 사상은있되 이론은없기때문이다

또한 정신적인 혁명을 이끈간디와도 비교가된다. 앞으로도 언제어느곳이던 빈부의격차가 심화된다면.. 제2의 게바라는 나올것이다...

배고픔의혁명이란 소수의자본가가 자산을 혼자독식할때 민중에 의하여 자연발생적으로 나올수밖에없다

수익의 10%정도만 민중에게 배풀어주어도 민중은 그저감사할따름이라고 생각하고있는대도, 그마저도 독식하려는 자본가로인하여 민중은 자신과 가족의 생존을 위해서 일어서는것이다.

설사 실패로돌아간 혁명일지라도 자본가에게는 자본가와 민중이 서로공존해야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니까말이다.. -

그러나.. "총칼을든 혁명은 한명의 독재자를 만들어낼뿐이며, 민중의 삶의질또한 변할것이 없을뿐이다" -

그러나.. 혁명은 최악의존재상황인경우 필요하다..

"자본시장이 무너지지않는이상 자본가는 앞으로도 영원히 민중을 지배할것이다"

이데올로기적인사상의 혁명은 배고품에서 출발하는것이며, 절대적인 민중의 지지를받으며 성공과 실패를 거듭하였다.

지구촌이 점점발달하는과정에서 이제 지구촌에서의 배고픔으로인한 혁명은 스스로 소멸되고 있는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존재하는한 혁명은 언제든 일어날것이며, 미래의 이데올로기적인 혁명은 배고픔이 아닌정신적인 박탈감에서 나오지않을까...!

◈SOS poisonous Music◈

 

 

Posted by 천마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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